자유 게시판

10여년 전 그가 처음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부임할 때, 서울시향의 음악홀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시향 소속 단원들의 농성이 이어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가 기존 단원들도 예외없이 테스트를 받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모험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시향 단원이 되면 공무원과 같은 대우를 받고 공무원과 같은 정년을 보장 받는 안정된 직업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음악감독이 오더니 다짜고짜 기존 단원들도 테스트를 받으라고 하고, 여기서 탈락하면 가차없이 아웃되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니 기존 단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는 그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서울시향이 그저그런 오케스트라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새로이 출발하는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그가 2008년 연속극 ‘베토벤 바이러스’의 괴팍한 강마에의 실제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습니다. 시향의 문호를 대폭 개방하여 해외 출신 연주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악장(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외국인이 차지하였습니다. 그 동안 국내 유명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우대해주던 관행을 과감히 버리고 끝없는 내부 경쟁을 유도한 결과 연주의 질이 놀라보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로 연주 여행을 다닐 만한 수준까지 올라가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마에스트로 정’의 조련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그가 지난 해 시작한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 시도는 그 첫 성과물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특히 말러 해석에 있어 독보적인 반열에 올라 있다는 인정을 받고 있는 그가 세계 클래식 시장에 내 놓은 도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이끄는 서울시향이 이번에 또 한 번 일을 냈습니다. 세계적인 에든버러 음악축제에 초청을 받은 것도 놀라운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있는 유럽 애호가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가 연주한 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잊혀진 봉헌>, 한국 작곡가 진은숙의 첼로협주곡 <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유명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었습니다.

지난 번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한 서울 시향 연주 <비창 교향곡>을 들을 때 차이코프스키 해석의 절정의 경지를 확인하였는데, 동일한 감동을 유럽의 객석에도 선사하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4악장이 조용히 끝나고 무겁게 내려앉은 마에스트로의 어깨 너머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각본에 의한 연출이 아닌, 진정으로 음악에 깊이 몰입한 거장의 공명을 느꼈습니다. 객석에서도 거장의 침묵에 압도되어 박수를 치는 것을 잠시동안이나마 잊고 있었습니다.

<교향곡 6번 비창>이 작곡자 차이코프스키의 지휘에 의해 초연된 후 9일 만에 작곡자는 돌연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콜레라 병사, 동성애와 관련한 자살, 타살 등 여러가지 루머가 떠돌고 있지만, 현재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을까?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관악과 현악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인생의 무상과 슬픔을 아름다운 화음에 실어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1악장과 4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슬픔의 의미를 어떻게 이렇게도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감탄할 뿐입니다. 1악장에서는 운명에 저항하다가도 체념하는 인간의 감정기복을 담아낸 찬란한 슬픔이 느껴지고, 4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 앞에서 흐느끼며 절망하는 슬픔이 들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