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새해 첫 주간에 사도 바울을 생각합니다. 예수님 이후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선택할 거라 봅니다. 교회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사도 바울이 신약시대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대속 및 부활로 완성된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 땅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인의 복음이 되게 하는 초석이 되었던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정교한 신학에 담아냄으로써 1500여년 후에 이신칭의(以信稱義 ; Sola Fide)로 요약되는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에 대의명분을 제공했던 분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가 예수님과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는 장소에서 증인으로 나오는 장면에서 처음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 후 그는 열렬한 그리스도교 박해자로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다마스커스)에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그 이후 열렬한 박해자에서 열렬한 추종자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은 바울을 선택하셨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쟁쟁한 열두 사도 중에 바울이 해낸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을까요? 그들 중에는 바울 만한 사람이 없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방법론을 보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상황,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질들을 적절히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초기 서신에 속하는 갈라디아서에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 (갈1:15,16). 이는 바울의 바울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나게 하시어 30여년을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키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바울의 어떠한 자질들을 준비시키셨을까요?

첫째는 그의 출신과 관련됩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있어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도 있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자였습니다. 아마 부친이 어떤 연유로 해서 시민권자가 되었을 것이고, 자식으로서 시민권 상속을 받아 자연스럽게 로마 시민권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금 면제 등 여러 가지 특권이 주어지는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식민지 사람들은 20년이 넘게 로마군대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지금의 미국 시민권보다 더 가치 있는 시민권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 자체가 주는 의미보다는 유대 땅이 아닌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소는 동서간의 주요 교역로에 위치해 있어서 바울에게는 세계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토양이었을 것입니다. 다소는 또한 그 당시의 주류 철학 사조였던 스토아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로마 시민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의 국제 공용어였던 헬라어와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방인들(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의 출신과도 관련되지만 그는 탁월한 철학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조심스러운 가설입니다만,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핵심그룹인 열두 사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가지는 의미를 구약과 연결시켜 신학적인 정교함과 목회적인 이해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제자가 유감스럽게도 없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주요 사역지가 이스라엘 땅 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지방이었고, 자연스럽게 핵심 제자 그룹도 그 곳에 살고 있었던 어부, 세리, 열심당원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은 청년 예수에게서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고, 그를 따라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탁월했지만, 예수님의 사역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신학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봅니다. 바울신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를 다른 사도가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많은 상상이 아닌가 합니다.

셋째로 그는 엄격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이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베냐민 지파의 후예이고 따라서 이름도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왕과 같은 이름을 썼습니다(바울이란 이름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다소에서 한편으로는 로마시민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바리새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당시에 가장 존경 받는 율법의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엄격한 랍비 교육을 받았습니다. 가말리엘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듯이 유대민족 최고 자치 행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경청할 만큼 권위를 인정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안을 보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하는 그는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가말리엘은 후에 바울의 권유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아마 바울은 다메섹 회심 이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가말리엘 스승을 만나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면서 적극적으로 스승에게 전도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에게서 배운 바울이었기 때문에 엄격함과 하나님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랍비로 준비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단지 스승이 가졌던 원숙함보다는 젊은 패기와 유대교에 대한 그릇된 열정이 유대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율법 및 성전을 상대화하는 예수 및 그 추종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초의 순교인 스데반 집사의 순교도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성전)에 계시지 않는다”(행 7:48)는 말을 함으로써 발생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박해하여 말살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넷째로 그는 투철한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한 번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거나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집념의 화신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디모데후서의 아래 구절이 그의 이러한 집념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위의 말씀대로 바울은 단 한 번의 흔들림도 없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명을 다 하듯이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에서 순교함으로써 세계를 복음으로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순교는 패배가 아니라 그 뿌려진 피가 부르는 새로운 승리의 시작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