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사귐’이
관계를 채색하는 색감의 다채로움과 어울림 등을 나타낸다면,
이 색감이 얼마나 진하고 선명하냐 혹은 화려하고 찬란하냐를 놓고
관계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얼핏 관계의 ‘너비’와 ‘깊이’ 차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깊고 강렬한 관계를 요즘 말로 ‘필’(Feel)이 꽂힌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 남자도 참 안됐다.
어쩌다 너 같은 애한테 필이 꽂혀 가지고, 이 고생이냐...

몇 년전 한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지요. (발리에서 생긴 일)
재벌 집 망나니 아들(조인성)이
가난하고 볼품없는 여자(하지원)에게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보며
그 친구(신?)가 던진 말입니다.

난 네가 남자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해
우리 어디 갈데 까지 한번 가보자

최근의 또 다른 드라마에서 유행시킨 대사입니다. (커피 프린스 1호점)
여자를 남자로 알고 있는 남자(공유)가
그 여자인 남자(윤은혜)를 향해 무너지면서,
세상에 외친 도전장입니다.

(제가 드라마만 보고 산다고 오해는 마십시오.
아니 솔직히 드라마를 즐겨 보기는 하는데, 눈은 제법 높아서 아무거나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이 꽂힌다는 것
이건 참 특별한 관계입니다.
‘사귐’이란 말이 전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한 질감(texture)을 전하는 관계입니다.    

그 감정의 밀도는 진하고 계곡은 깊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생각만 해도 뭉클하고 아린 가슴,
다시 볼 날을 헤아리는 안타까움,
그 기쁨과 설렘, 그 애타함과 성가심)

그런데 그 감정이 제 멋대로 움직입니다.
(참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딱히 별다른 이유도 조건도 없는데도 자꾸 그 쪽으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그 주체 못할 마음의 흐름, 부딪침, 웅켜쥠.)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한 작은 손짓, 사소한 한마디 말, 무심히 스치는 한 눈길,
생각지 못했던 장소, 뜻밖의 상대, 돌이켜 보면 너무도 우스운 이유,
불현듯 방심한 마음을 꿰뚫고 지나가는 화살,
꼬꾸러지는 마음, 무너짐.)

그래서
‘필’은 본질적으로 위험한 관계입니다.
블랙 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
용광로처럼 녹여 버리는
그래서 모든 것을 내 던지고 뛰어들 수 밖에 없는
깊고 어두운, 심연 같은 관계입니다.
그 끝이 어디로 어떻게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맞닥뜨릴 때
이걸 과연 행복이라 해야 할까요 불행이라 해야 할까요
축복이라 해야 할까요 저주라 해야 할까요

실제 이런 ‘필’을 그리는  
많은 인생의 작품들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고 맙니다.
(러브 인 시베리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맞지요, 김 집사님)

그런데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축복이든 저주이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필은 소위 관계의 ‘형식’으로 박제되지 않은,
가장 원형의 감각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관계의 ‘형식’을 만들어 냅니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임금과 신하, 상사와 부하, 형제와 자매, 친구와 애인, 등
모두 우리가 만들어 내는 관계의 형식들입니다.
이 관계의 형식들은 다들 그 형식에 맞는 규격화 표준화된 감정의 세트를 달고 다닙니다.  
부모와 자식은 존경과 사랑이란 감정의 세트,
남편과 아내는 애정과 존중이란 감정의 세트,
임금과 신하는 충성과 배려라는 감정의 세트, 등

이런 규격화 표준화된 감정의 세트는 마치 잘 진열된 상품 선반을 연상시킵니다.
진열대 1번: 사랑이란 감정; 사이즈 1에서 10; 용도는 20년 된 부부용…등…
그래서 우리의 관계란 모두 이런 감정의 선반에서
규격화, 표준화된 감정을 하나씩 필요할 때 마다 꺼내어 들고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필은
단순히 이들 관계의 ‘형식’이 전제하는, 그래서 자동적으로 그 관계에 깃드는,
그런 익숙하고 당연하고 합당한 감정이 아닌,
대신 우리 내면 깊숙한 곳,
그 관계의 형식 너머 어딘가로부터,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스물거리며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해서 생경하며, 불편하며, 모호한,  
그리고 원튼 원치 않든
그것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치명적(fatal)인,
그런 근원적, 능동적, 불가항력적 감각이란 것이지요.  

이런 ‘필’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기에  
두렵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 만이 누리는 ‘감각’의 호사요 사치요 그리고 함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필’을 얘기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혹시 이런 ‘필’의 관계 아닌가 해서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의 세상적 감각에 비추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나는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런 가슴 뛰는 ‘필’이 있는가
묻게 된다는 것이지요.

과연 그 관계는 내 모든 것을 던지게 할 만큼 위험하고 치명적인가,  
아니면 익숙하고 편안하고 당연한가

나는 혹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냥 아버지와 자녀라는 어떤 ‘형식’으로 범주화 하고,
그 안에 가두고, 축소시키고, 고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관계가
얼마만큼 나를 삼키고 눈 멀게 하고 무너지게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면서,
그냥 살면서 맺는 여러 당연한 관계의 하나로 박제하며,    
그래서 진부하게, 건조하게, 지루하게, 건성으로,  
멀뚱하니, 마치 하품하듯 그 관계를 채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이다스의 손 마냥,
금빛으로 화려하지만, 생명은 없는
그런 화석화된 관계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게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처럼 감각이 무디어 있는 세대,
그 세대를 살아 낸, 또 견디어 내고 있는,
특히나 인생 여정의 메마르고 찌든 연배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한번쯤 던져봐야 할 질문이지만,
갑자기 적잖이 불편해 집니다.

이런 ‘필’만 있다면
목사님 설교 말씀처럼
적당한 반쪽 그리스도 인이 아닌
온전한 그리스도 인으로 사는 것도 별반 힘들어 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

----------------

후석이가 며칠 후면 중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목사님 이하 많은 분들이 후석이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새벽 마다 건강과 진로을 놓고 기도해 주셨고,
하루가 멀다 하고 후석이 주사도 놓아 주셨고,  
여러 연변 지인들도 소개해 주셨고,
중국 돈도 주셨고,
다들 어깨 두드리며 격려해 주셨고,
바쁜 시간을 쪼개 점심도 사 주셨고…
모든 분께 저희의 감사와 사랑 전합니다.

후석을 비롯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 딛는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가 빌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축복,  
우리 전가의 보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코 우리 삶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그 깊고 찬란한 사귐 말이지요.
이 사귐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있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