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 ‘천사’

아버지와 함께 함경남도 단천에서 피난을 나와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세명의 고모할머니들 중에 가운데 고모할머니의 딸이 경희아줌마다. 나와는 다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아줌마벌이어서 늘 아줌마라고 불렀다. 갈래머리를 하고 흰 깃에 까만 교복을 입고 허리를 동여맨 아줌마의 모습이 생각나는데 쌍꺼풀이 진 큰 눈이 유난히도 맑았던 아주 예쁜 여학생이었다. 그 시절에도 초등학생인 나에게 아줌마 소리를 들었으니 그리 좋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경희아줌마는 아줌마라고 하지 말고 언니라 부르라 했지만 어른들께서 꼭 서열 그대로 호칭을 따르라고 하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아줌마가 자연스러워졌다.
그런 아줌마가 어제 우리집에 오셨다.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우셨던 모양으로 양 손에 더 이상 들을 수도 없을만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경희아줌마는 으스러지게 자신의 몸뚱이를 24시간 내내 바지런히 움직이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등학교 때에 정신 분열 증세를 보여 평생 어머니와 여동생의 수발을 받아온 오빠와, 수 년 전부터 신장투석을 받는 엄마,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체장애판정을 받아 열다섯 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세 살의 지능을 하고 있는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시간을 고루 나누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짬짬이 인쇄업도 병행해야 한다.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줌마를 생각하면 내가 호강에 초를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많이 있다.

요즈음에 어느 쇼 프로그램에서 가수지망생의 노래를 듣고 평가하는 심사위원의 말 중에서 ‘슬픈 노래를 온통 슬프게 부르는 것보다 슬픈 노래를 웃음을 머금고 부르는 것이 더욱 슬프다’라고 하며 지망생에게 거의 울 듯한 표정보다는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불러보라는 권유를 하던 것이 생각난다. 아줌마에게는 이렇게 의도된 미소와 웃음이 아니라  아줌마에게 주어진 환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의 환한 웃음이 늘 함께 있다. 태양같이 환한 웃음이 있다. 아줌마의 삶을 지켜보았던 난 그런 아줌마의 모습이 더 슬프다.

어제 아줌마가 집에 오셔서 하신 말씀 중에 “난 최근에야 내 두 눈이 밝아졌다. 나쁘게 말하면 둔하고 미련한거고 좋게 말하면 착한건데 결혼생활 23년만에 좀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것 같아. 내 상황들을 두고 사람들이 여러 말을 해도 난 전혀 그것을 감지 할 수 없었어. 피부가 두꺼운 탓인가! 전혀 느껴지지 않더라고... 아직도 큰 아들은 엄마가 철이 덜 들었대나 뭐래나.”

아줌마의 둘째 아들은 최근까지 하계동에 있는 정민학교에 다녔고 이제 졸업만을 앞두고 있다. 그 곳에 다니는 아이들 중에는 그래도 휠체어에 앉아 먹여 주는 밥을 먹고 소화도 잘 시키는 본인의 아들은 굉장히 우수한 학생이라고 했다. 어린이대공원에서 하계역까지 휠체어를 끌고 그곳에 다시 20여분을 정민학교까지 밀고 통학을 3년간 하셨다. 이제 새로운 센터를 알아보았고 음악치료를 병행한다고 하는 아줌마의 말에서 15년 이상을 함께 해 오면서 지친 구석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새로운 입학을 꿈꾸는 설레는 심정의 소녀 같다고나 할까?

친정오빠는 최근 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급격히 좋지 않았다가 다시 퇴원을 맞이하신 고모할머니는 오랜 병원생활 끝에 집으로 오신다. 아줌마는 전장이라도 나가는 듯이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었다. 생활고와 씨름하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과 씨름하고, 또 자신의 체력과 씨름하고...

지난해 가족들의 어려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일들을 겪으면서 ‘이제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여한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극한의 고통을 견디어 내셨는데 ‘난 이 세상에서 천사라고 하는 말이 제일 싫다. 무슨 천사... 주변사람들은 저 집안에 천사가 있다고 하는데 내 안을 들여다보지 못한 거지. 나에게 천사는 미련하고 부담스러운 족쇄같다’라고 한다.

난 아줌마의 미련함을 애절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무딤 속에 그 모습을 바라보시는 구세주의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 아침에 멀티메일로 문자가 왔다.
‘은지맘~어제 즐거웠어^^ 다복한 모습 참 보기 좋더라^^ 고난의 뒷면은 유익과 축복이지^^ 내가 하나님 축복은 자기보다 한 수 위인 듯♥~ 은지맘도 나만큼이나 바쁘고 행복해 보이더라^0^ 행복은 언제나 주관적이라서... 잘 지내고 가족들한테 잘해줘^^’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숙제를 아줌마처럼 미련함으로 성실함으로 해 나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감히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순간순간 주신 숙제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을 잃지 않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