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박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 이야기입니다.
박찬욱 감독 작품으로 얼마 전 칸 영화제 (?) 상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평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극찬과 악평 양 갈래인데 제 주변 사람들은 주로 악평 쪽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구역질 때문에 식사를 못했다는 사람도 몇 있습니다.
왠지 영적 부패의 악취가 난다고 할까요.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
극찬 악평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신 이런 저런 생각은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뱀파이어 스토리가 가지는 의미의 심층구조에 대한 생각입니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사람들이 뱀파이어 스토리에 대해 왜 그토록 집착하는지 궁금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늑대인간 스토리와 더불어 가장 빈번하게 재생산되는 공포영화 기제이니까요.

그때는 그냥 우리의 처녀귀신 정도에 해당하는 설화적 모티브 정도려니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이번 박쥐를 보면서 뱀파이어 스토리는 단순한 공포영화 기제를 벗어나는 묘한 영적 울림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죄’의 속성과 본질에 대한 인간의 상상입니다.  

뱀파이어 영화가 인간의 ‘죄’의 문제를 다룬 ‘영적’ 영화라니...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 보면  
뱀파이어 스토리는 결국 우리 무의식 속에 형성되어 있는 죄에 대한 인식, 그 속성과 본질에 대한 인간의 상상을 하나의 스토리 구조에 담아서 그려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인간의 묘한 이끌림(attraction) 내지 접붙임(attachment)도 같이 그려내고 있고요.

‘죄’가 무엇인지 백 프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 ‘죄’의 모습을 하나의 구체적 이미지로 그려낸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죄는 ‘갈증’(thirst)이다.
이것이 박쥐가 우리에게 들이미는 ‘죄’의 모습입니다.

어둠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웅크리고 않아
끊임없는 갈증을 불러 일으키고 그 갈증에 목 마르게 만드는 무엇,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애타게 어둠 속을 헤매게 하며,
맞닥뜨리는 모든 영혼을 공격하고 갈취하고 희롱하게 하고,
그래서 그 숨결이 닿는 모든 것을 자기처럼 어두움의 존재로 만들고 마는 무엇,
죄는 바로 그런 것이고, 그런 죄를 향해 자석처럼 이끌려 가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뱀파이어 스토리가 그려내는 ‘죄’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이 ‘죄’는 존재론적 설정입니다.
단순한 속성 내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뱀파이어라는 존재로 실체화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를 먹고 사는, 다시 말해 존재의 영위를 위해 ‘죄’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물론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이 존재는 끝없는 절망으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절망입니다.
빛 앞에 나갈 수 없는데서 오는,  
본질적으로 빛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데서 오는 존재론적 절망입니다.

그런데 박쥐를 여태까지의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와 구별 짓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솔직히 이게 없었더라면 여전히 그냥 잘 만들어진 공포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빛’을 향한 뱀파이어의 그 주체할 수 없는 열망입니다.
뱀파이어가 가진 ‘빛’을 향한 열망,
이것은 참 역설적이고 자기부정적 입니다.
빛을 향해 나감이 곧 자기 존재의 완전한 함몰임에도 뱀파이어는 그 빛을 열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에 자기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재로 만듭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갈증,
그 갈증을 채우는 어둠 속의 절망적 유희,
그리고 그 절망적 유희의 비극적 해피 엔딩(?)을 박쥐는 짙은 회색 톤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죄의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섬뜩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영적 메스꺼움이 그래서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영화는 결국 해피 엔딩입니다.
죄는 죄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 듯 합니다.
비록 우리 속에 죄에 대한 갈증과 빛을 향한 열망이 공존하며,
그래서 그 공존의 이율배반적 존재를 우리 모두가 뱀파이어로 살고 있지만,
그래서 산다는 것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단절, 절망의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결국 죄는 이겨질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싶어 하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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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벽에 호세아 강해를 들으면서 왠지 이 박쥐란 영화를 떠 올렸습니다.  
호세아 서가 애통해하는 영적 부패의 모습이 영화 속 뱀파이어의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서 입니다. 물론 저의 쓸데없는 공상이겠습니다.

어쨌든 영적 부패의 모습이 우리 속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특히 영적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이 문제를 놓고 더욱 깊이 고민합니다.
저 같은 보통 사람이면 그냥 대충 넘어갈 일도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여자는 이 신부의 고민을 비웃습니다.
착각하지마, 우린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거야.
물론 신부는 빛으로부터 도망치는 이 사랑하는 여인을 꼭 부등켜 안고 찬란한 빛 속으로 걸어가지요.

보통은 인간이 뱀파이어를 무찌르고 혹은 구원하는 설정인데
이건 뱀파이어가 뱀파이어를 구원하는 다분히 아이로니컬한 설정입니다.
한 뱀파이어의 빛을 향한 열망이 그가 사랑하는 이를 구원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빛을 향한 열망과 사랑이 있는 한,
그가 뱀파이어든 인간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빛을 향한 열망, 그 빛을 통한 구원은
우리의 타락이 더 이상 바닥을 칠 수 없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엔도 슈샤꾸의 역설도 떠 올리게 됩니다.
어쨌든 많은 종교적 모티브가 섞여서 혼란스러운 영화입니다.

그렇지만 절대 이 영화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안 보는게 좋은 영화인 듯 합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긴 안 읽는게 좋은 글이 되고 말았네요....쏘리 쏘리 쏘리